이름을 부르는 나 /김원열
https://youtu.be/fkrMW7LbT0M
✨ 프롤로그
나는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말을 잃은 것이 아니라, 말할 이유를 잃은 것이었다. 세상은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고, 나 역시 누구의 이름도 부르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낡은 교회를 만났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사로를 만났다. 죽었다가 살아난 자. 그의 이름은 나를 흔들었고, 그의 침묵은 나를 깨웠다.
이 이야기는 그와 나, 그리고 우리 모두의 이름에 관한 기록이다. 잊힌 이름들, 불리지 못한 이름들, 그리고 다시 불려야 할 이름들에 대하여.
🕊️ 에필로그
나는 여전히 이름을 부르고 있다. 어떤 이름은 아직 대답하지 않고, 어떤 이름은 조용히 눈을 뜬다. 그 이름들이 다시 살아날 때, 나는 그 사람의 존재가 이 세상에
다시 새겨지는 것을 본다.
나사로는 사라졌지만, 그의 이름은 남았다. 그리고 그 이름은 나를 바꾸었다. 이제 나는, 이름을 부르는 자가 되었다.
그것이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누군가의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주는 일. 그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조용하고도 강한 구원이라는 것을 나는 믿는다.
✍️ 작가의 말
이 소설은 ‘이름’이라는 단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고, 또 얼마나 자주 그
이름을 잊고 살아갈까요? 이름은 단지 호명이 아니라, 존재의
증명이며 관계의 시작입니다.
《이름을 부르는 자》는 상처 입은 이들이
서로의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주며, 다시 살아나는 이야기입니다. 이 소설을 쓰는 동안, 저 역시 제 안의 오래된 이름들을 하나씩
꺼내어 바라보았습니다.
이 이야기가 당신의 마음속에도 잊고 있던
이름 하나를 떠올리게 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조심스럽게
불러보기를.
감사합니다. — Won
🗂️ 목차
- 나
- 낡은 교회
- 나사로
- 이름 없는 자들
- 불러지지 않은 이름
- 불의 방문
- 나사로의 고백
- 사라진 이름
- 바늘귀 하우스
- 이름을 부르는 자 에필로그 작가의
말
제1장: 나
아침 6시 45분. 나는 눈을 떴다. 알람은
울리지 않았다. 울릴 필요가 없었다. 몸이 먼저 기억했다. 이 시간에 깨어나는 건 습관이 아니라, 일종의 방어였다. 하루가 나를 덮치기 전에 먼저 깨어나는 것. 그것만이 내가 세상과
맺고 있는 유일한 주도권이었다.
커튼은 닫혀 있었다. 나는 커튼을 열지 않았다. 창밖은 늘 회색이었다. 계절이 바뀌어도, 날씨가 맑아도,
내 눈엔 늘 같은 색이었다. 빛이 들어오면 방 안의 먼지가 떠올랐다. 그건 마치 내 안의 기억들이 떠오르는 것 같아서, 나는 빛을 꺼렸다.
나는 부엌으로 가서 커피포트를 올렸다. 물 끓는 소리는 유일하게 살아 있는 소리였다. 그 소리를 들으며
나는 싱크대에 기대 섰다. 이 집에 온 지 3년째였다. 처음엔 잠깐 머무를 생각이었다. 하지만 ‘잠깐’은 언제나 가장 오래 머무는 말이었다. 나는 이 집에 눌러앉았고, 이 집은 나를 가둬두었다.
커피가 다 내려가고, 나는 잔을 들고 창가에 앉았다. 이 창은 북쪽을 향하고 있었다. 해는 들지 않았고, 바람은 늘 찼다. 나는 그 차가움을 좋아했다. 따뜻한 것들은 대개 오래가지 않았다. 사람도, 말도, 약속도.
나는 말이 없었다. 말이란 누군가를 향해 던지는 것이고, 내겐 그런 대상이 없었다. 휴대폰은 침묵했고, 초인종은 고장 난 지 오래였다. 나는 고치지 않았다. 누군가 찾아올 일도, 내가 누군가를 기다릴 일도 없었으니까.
책상 위엔 읽다 만 책들이 쌓여 있었다. 책갈피는 1/3쯤에서 멈춰 있었다.
나는 끝까지 읽는 걸 잘 못했다. 이야기든, 관계든, 삶이든. 처음은 늘 조심스럽고 아름다웠지만, 중간쯤에서 나는 지쳐버렸다. 결말은 언제나 내 것이 아니었다.
나는 자주 걷는다. 걷는다는 건 도망이기도 하고, 탐색이기도 했다. 어디론가 가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도 속하지 않기 위한 움직임. 그날도 나는 걷고 있었다. 평소와는 다른 길로 접어들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다만, 발이
그리로 향했다.
그 길 끝에 오래된 교회가 있었다. 붉은 벽돌은 군데군데 무너져 있었고, 십자가는 기울어져 있었다. 문은 반쯤 열려 있었고, 안은 어둡고 차가웠다. 나는 문턱에 서서 한참을 망설였다. 하지만 결국, 발을 들였다.
안은 먼지와 침묵으로 가득했다. 낡은 벤치, 깨진 유리창, 그리고
누군가의 기도가 남아 있는 듯한 공기. 그곳은 폐허였지만, 이상하게도
따뜻했다. 나는 그곳에 앉았다. 아무 말 없이, 아무 생각 없이. 그 순간, 나는
처음으로 ‘어딘가에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그곳에 다시 오기로 마음먹었다. 왜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곳은 나를 부르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데, 누군가가 있는 것 같은 공간. 말이 없는데, 말이 들리는 것 같은 침묵. 그 교회는 나를 기억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 교회를 기억하게 되었다.
✦ 제2장:
낡은 교회
그날은 이상했다. 하늘은 흐리지도, 맑지도 않았다.
바람은 불지 않았고, 공기는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았다. 모든
것이 애매했다. 그 애매함이 나를 낯선 길로 이끌었다.
나는 평소와는 다른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익숙한 골목을 지나치고,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는 좁은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그 골목은 마치 오래된 기억처럼 조용하고 눅눅했다. 벽에는
오래된 포스터가 찢겨 붙어 있었고, 바닥엔 낙엽이 눌어붙어 있었다. 나는
발끝으로 그것들을 밀며 걸었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지만, 멈추고
싶지도 않았다.
그 길 끝에서 나는 교회를 보았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오래된 건물. 지붕은 군데군데 내려앉아 있었고, 십자가는 기울어져 있었다. 창문은 대부분 깨져 있었고, 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누군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나는 문 앞에 섰다.
문턱에 발을 올리는 데 시간이 걸렸다. 나는 안으로 들어가야 할지, 돌아서야 할지 망설였다. 하지만 돌아갈 이유도, 돌아갈 곳도 없었다. 나는 조용히 문을 밀었다. 낡은 경첩이 낮게 울었다. 그 소리는 마치 오래된 숨소리 같았다.
안은 어두웠다. 빛은 천장의 구멍을 통해 아주 조금만 들어오고 있었다. 먼지가 빛을
따라 떠올랐다. 나는 그 먼지들이 마치 오래된 기도처럼 느껴졌다. 말로
다하지 못한 간절함,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이름들. 그것들이
공기 속에 떠다니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바닥은 삐걱거렸고, 벤치는 군데군데 부서져 있었다. 강단은 텅 비어 있었고, 제단 위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 빈자리가 이상하게도 가득 차 보였다. 무언가가 있었던
자리. 그리고 여전히 무언가가 남아 있는 자리.
나는 맨 앞줄 벤치에 앉았다. 앉는 순간, 나도 모르게 숨을 내쉬었다. 그 숨은 마치 오래된 짐을 내려놓는 것 같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 안에서 무언가가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곳은 폐허였다. 하지만 그 폐허는 나를 위협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감싸 안았다. 나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괜찮다’는
느낌을 받았다. 누군가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착각. 아니, 바람처럼 스쳐가는 위로.
나는 그곳에 다시 오기로 마음먹었다. 왜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곳은 나를 부르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데, 누군가가 있는 것 같은 공간. 말이 없는데, 말이 들리는 것 같은 침묵. 그 교회는 나를 기억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 교회를 기억하게 되었다.
그날 이후, 나는 매일 그곳을 향해 걸었다. 그 길은 점점 익숙해졌고, 교회의 침묵은 점점 내 안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그곳에서 무언가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분명히 누군가가
올 것 같았다.
그리고 며칠 뒤, 나는 그를 만났다. 나사로. 죽었다가
살아난 자. 그 이름은 처음부터 나를 흔들었다.
제3장: 나사로
그는 조용히 다가왔다. 나는 그가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날도 나는
교회 안 맨 앞줄 벤치에 앉아 있었다. 빛은 천장의 구멍을 통해 사선으로 떨어지고 있었고, 먼지는 여전히 공기 중에 떠다니고 있었다. 나는 그 빛을 바라보다가, 문득 누군가의 시선을 느꼈다.
“여기, 자주 오시나요?” 낯선 목소리였다. 나는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는 내 옆 벤치에 앉아 있었다. 언제 들어왔는지, 어떻게 다가왔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의 존재는 마치 오래된
그림자처럼 조용하고 자연스러웠다.
그는 검은 셔츠에 낡은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머리는 짧았고, 눈빛은 깊었다. 그
눈빛은 마치 오래된 우물 같았다. 겉은 고요하지만, 그 안엔
무언가가 잠들어 있는 느낌. 나는 그 눈을 피하지도, 마주하지도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입니다.” 내 목소리는 생각보다 작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럴 줄 알았어요. 낯선 기운이 느껴졌거든요.” 그 말은 이상하게도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오래된 친구가 내 안을 들여다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여긴, 잊힌 사람들의 집이에요.” 그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 말의 의미를 묻지 않았다. 그 말은 설명보다 더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잊힌 사람들. 그 말은 곧 나였다.
“이름이 뭐예요?” 그가 물었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이름을 말한다는 건, 나를 내어주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에게는 말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이안.”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이름이에요. 살아 있는 이름.”
“당신은요?” 내가 되물었을 때, 그는 잠시 침묵했다. 그 침묵은 짧았지만, 깊었다. “나사로.” 그
이름은 내 안에서 무언가를 건드렸다. 죽었다가 살아난 자. 그
이름은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고백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 이름을 속으로 되뇌었다. 나사로. 그 이름은 낯설고도 익숙했다. 마치 오래전 어딘가에서 들은 적 있는 이름처럼. 그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앉아, 나와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은 어색하지 않았다. 그건 마치 오래된 음악의 쉼표
같았다. 소리보다 더 많은 것을 담고 있는 공백. 나는 그와
함께 있는 것이 편안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날 이후, 그는 자주 나타났다. 어느 날은 먼저 와 있었고, 어느 날은 나보다 늦게 왔다. 우리는 많은 말을 나누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점점 그를 기다리게 되었다. 그가 오지 않는 날이면, 교회는 다시 폐허로 돌아갔다.
그는 내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았다. 그저 곁에 있었다. 그것이 나를 조금씩 바꾸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묻고 싶었다. 왜 이곳에 있는지, 왜 나에게 말을 걸었는지, 왜 그런 이름을 가지고 있는지. 하지만 나는 아직 묻지 않았다. 그의 침묵은, 때로는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제4장: 이름 없는 자들
그는 말없이 문을 열었다. 교회 안쪽, 강단 뒤편에 숨겨진 문이었다. 나는 그 문이 거기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문은 오래된 나무로
되어 있었고, 손잡이는 차가웠다. 그가 먼저 내려갔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은 좁고 가팔랐다. 발을 디딜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벽에는 희미한 전등이
하나 켜져 있었고, 그 불빛은 마치 오래된 기억처럼 깜빡거렸다. 나는
손으로 벽을 짚으며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계단 끝에는 또 하나의 문이 있었다. 그 문을 열자, 나는 숨을 멈췄다.
그곳엔 사람들이 있었다. 말없이 앉아 있는 노인, 벽을 바라보는 소녀, 손톱을 물어뜯는 청년. 그들은 서로를 보지 않았고, 서로를 부르지 않았다. 그 방은 조용했다. 하지만 그 조용함은 단순한 침묵이 아니었다. 그건 마치, 말이 사라진 세계 같았다.
나는 문턱에 멈춰 섰다. 그들의 존재는 나를 압도했다. 그들은 살아 있었지만, 마치 살아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들의 눈은 흐릿했고, 손은 가늘었고, 숨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마치 이름을 잃은 사람들 같았다.
“이름을 잃은 사람들입니다.” 나사로가 조용히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방 안에서는 또렷하게
울렸다.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들을 향해 다가가, 한 사람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 사람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손길은 거부되지 않았다.
“이름을 잃는다는 건, 존재가 희미해진다는
뜻이에요.” 그는 내게 말했다. “누군가가 당신을 부르지
않으면, 당신은 점점 사라집니다.” 나는 그 말의 의미를
곱씹었다. 그건 단지 비유가 아니었다. 그는 진심이었다.
나는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한 여인이 구석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무릎을 끌어안고 있었고, 머리카락은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고 싶었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너무 조용했고, 너무 멀었다. 마치 다른 시간 속에 있는 사람 같았다.
“그들은 스스로의 이름을 잊었고, 세상도
그들을 잊었어요.” 나사로는 말했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닙니다. 누군가가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준다면… 그들은 돌아올 수 있어요.”
나는 그 말을 듣고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말은 너무 무거웠고, 너무 슬펐다. 나는 그 방에 앉았다. 그들과 함께, 아무 말 없이. 그 침묵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나 자신이 얼마나 오래 침묵해왔는지를 깨달았다.
그날 이후, 나는 매일 그 방에 내려갔다. 나는 그들과 함께 앉아 있었고, 그들의 숨소리를 들으려 애썼다. 그들은 여전히 말이 없었지만, 나는 그들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그 존재는 희미했지만, 분명히 거기 있었다.
나는 그들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 이름들을 부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것이 내가 이곳에 있는 이유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제4장: 이름 없는 자들
그는 말없이 문을 열었다. 교회 안쪽, 강단 뒤편에 숨겨진 문이었다. 나는 그 문이 거기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문은 오래된 나무로
되어 있었고, 손잡이는 차가웠다. 그가 먼저 내려갔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은 좁고 가팔랐다. 발을 디딜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벽에는 희미한 전등이
하나 켜져 있었고, 그 불빛은 마치 오래된 기억처럼 깜빡거렸다. 나는
손으로 벽을 짚으며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계단 끝에는 또 하나의 문이 있었다. 그 문을 열자, 나는 숨을 멈췄다.
그곳엔 사람들이 있었다. 말없이 앉아 있는 노인, 벽을 바라보는 소녀, 손톱을 물어뜯는 청년. 그들은 서로를 보지 않았고, 서로를 부르지 않았다. 그 방은 조용했다. 하지만 그 조용함은 단순한 침묵이 아니었다. 그건 마치, 말이 사라진 세계 같았다.
나는 문턱에 멈춰 섰다. 그들의 존재는 나를 압도했다. 그들은 살아 있었지만, 마치 살아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들의 눈은 흐릿했고, 손은 가늘었고, 숨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마치 이름을 잃은 사람들 같았다.
“이름을 잃은 사람들입니다.” 나사로가 조용히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방 안에서는 또렷하게
울렸다.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들을 향해 다가가, 한 사람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 사람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손길은 거부되지 않았다.
“이름을 잃는다는 건, 존재가 희미해진다는
뜻이에요.” 그는 내게 말했다. “누군가가 당신을 부르지
않으면, 당신은 점점 사라집니다.” 나는 그 말의 의미를
곱씹었다. 그건 단지 비유가 아니었다. 그는 진심이었다.
나는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한 여인이 구석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무릎을 끌어안고 있었고, 머리카락은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고 싶었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너무 조용했고, 너무 멀었다. 마치 다른 시간 속에 있는 사람 같았다.
“그들은 스스로의 이름을 잊었고, 세상도
그들을 잊었어요.” 나사로는 말했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닙니다. 누군가가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준다면… 그들은 돌아올 수 있어요.”
나는 그 말을 듣고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말은 너무 무거웠고, 너무 슬펐다. 나는 그 방에 앉았다. 그들과 함께, 아무 말 없이. 그 침묵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나 자신이 얼마나 오래 침묵해왔는지를 깨달았다.
그날 이후, 나는 매일 그 방에 내려갔다. 나는 그들과 함께 앉아 있었고, 그들의 숨소리를 들으려 애썼다. 그들은 여전히 말이 없었지만, 나는 그들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그 존재는 희미했지만, 분명히 거기 있었다.
나는 그들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 이름들을 부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것이 내가 이곳에 있는 이유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 제5장:
불러지지 않은 이름
그녀는 늘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지하실 안쪽, 창이 없는 벽을 등지고. 그곳은 빛이 가장 적게 드는 자리였다. 나는 처음엔 그녀가 사람인지, 그림자인지조차 분간하지 못했다.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고, 말하지 않았고,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긴 머리카락이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녀의 손은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손끝은 마치 돌처럼
굳어 있었다. 그 손은 아무것도 쥐지 않았지만, 무언가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보였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는 일이 점점 잦아졌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에게 말을 걸고 싶었다.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에게 다가가는 일은, 마치 얼어붙은 호수 위를 걷는 것 같았다. 조금만 무게를 실으면
금이 갈 것 같았고, 그 금은 곧 깨짐으로 이어질 것 같았다.
나는 그녀의 이름을 알고 싶었다. 아니, 어쩌면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를 처음 본 순간, 내 안에서 어떤 이름이 떠올랐다. 하지만 나는 그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그 이름이 틀리면, 그녀는 더 멀어질 것 같았다. 그녀가 나를 다시는 바라보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아직, 누군가를 부를 자격이 없었다. 내 목소리는 너무 오래 침묵 속에
있었고, 내 마음은 아직도 닫혀 있었다. 나는 그녀 곁에
앉아, 조용히 숨을 맞췄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어느 날,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아주 잠깐. 그 순간
나는 그녀의 눈을 보았다. 그 눈은 놀랍도록 맑았다. 하지만
그 맑음은 투명함이 아니라, 깊은 고요였다. 그녀는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숨을 멈췄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눈빛은 분명히 말하고 있었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아직 나 자신에게도 그 질문을 던지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입 밖으로 내보았다. 혼자 있을 때, 아무도 듣지 못하는 곳에서. “엘리사.” 그 이름은 내 안에서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그 이름이 진짜인지, 내가 만들어낸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이름은 내게 무게를 주었다. 책임처럼, 기도처럼.
나는 다음 날, 그녀에게 그 이름을 부르려 했다. 입술이 떨렸다. 목이 마르고, 손끝이 차가워졌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 이름은 내 안에서만 울렸다.
그녀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 그녀는 가끔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여전히 조용했지만, 어딘가 달라져 있었다. 나는 그 변화가 나 때문이기를 바랐다. 아니, 그 이름 때문이기를.
나는 아직 그녀의 이름을 부르지 못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부를 것이다. 그 이름이 그녀를 다시 이 세상으로 데려올 수 있다면. 그녀가 다시
자신을 기억할 수 있다면. 나는 그 이름을, 내 안에서 지키고
있을 것이다.
✦ 제6장:
불의 방문
그날 밤,
나는 이상한 예감을 떨칠 수 없었다. 공기는 평소보다 무거웠고, 바람은 방향을 잃은 듯 불었다. 나는 교회로 향하는 길목에서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누군가가 나를 따라오는 것도 아닌데, 등
뒤가 서늘했다. 그럴 리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교회가 보이기 시작했을 때, 나는 멈춰 섰다. 붉은빛이 어둠 속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처음엔 착각인 줄 알았다. 하지만 곧, 연기가 하늘로 솟구치는 것을 보았다. 불이었다. 교회가 타고 있었다.
나는 뛰었다. 숨이 가빠졌고, 다리가 휘청거렸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그곳엔 사람들이 있었다. 이름
없는 자들. 말없이 살아가던,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던 그들이.
입구는 이미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나는 옆문으로 돌아가 지하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뜨거운 공기가
얼굴을 때렸다. 나는 팔로 얼굴을 가리고 계단을 내려갔다. 연기
속에서 사람들의 기침 소리와 비명이 들렸다.
“이안!” 그 목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멈춰 섰다. 나사로였다. 그는
연기 속에서 사람들을 하나씩 끌어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그을음으로 뒤덮여 있었고,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여기 아직 남아 있어요!” 나는 그를 도우려
다가갔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너는 위로 올라가. 나는 여기 남을 거야.” “안 돼요. 같이 가요.” 나는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는 내 손을 조용히 떼어냈다. “기억하세요. 이름을.” 그
말은 낮았지만, 단호했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그가 이곳에 남으려는 이유를. 그는 자신을 지키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지키려는 것이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눈은 두려움이 아니라, 평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 순간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나는
더 이상 말하지 못했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계단을 올라갔다.
밖으로 나왔을 때, 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연기가 폐를 찔렀고, 눈물이 났다.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고 있었다. 이름 없는 자들이, 불길 속에서 빠져나와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었다. 그들은 여전히 말이 없었지만, 그들의 눈엔 생명이 있었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교회는 무너지고 있었다. 불길은 천장을 삼켰고, 십자가는 불 속에서 기울어졌다. 그 안에 나사로가 있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그날 밤,
나는 잠들지 못했다. 눈을 감으면 그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기억하세요. 이름을.” 그
말은 내 안에서 불처럼 타올랐다. 나는 그 이름들을 잊지 않기로 했다.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름도.
불은 모든 것을 태워버렸지만, 동시에 무언가를 남겼다. 그것은 책임이었고, 약속이었다. 나는 이제, 그
약속을 지켜야 했다.
✦ 제7장:
나사로의 고백
그날은 비가 내렸다. 오후 내내 흐리던 하늘이 저녁 무렵부터 조용히 울기 시작했다. 교회는
이미 불에 타 무너졌고, 우리는 임시로 마련한 작은 창고 안에 모여 있었다. 지붕은 낮았고, 벽은 습기 찼으며,
바닥은 콘크리트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곳은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피난처였다.
나사로는 구석에 앉아 있었다. 그는 며칠째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불이 난 날 이후, 그는 마치 안으로 깊이 가라앉은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그를 지켜보며
기다렸다. 그가 스스로 입을 열기를.
그날 밤,
그는 조용히 말했다. “이안.”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마른 나뭇가지처럼 부서질 듯했다. “내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겠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아주 오래된 문을 여는 사람처럼, 천천히 말을 꺼냈다.
“나는 한때 목사였어요.” 그 말에 나는
숨을 멈췄다. 그의 말투는 고백이라기보다, 판결문을 읽는
것 같았다. “젊었고, 열정적이었고, 사람들을 믿었죠. 무엇보다 신을 믿었어요. 그분이 나를 부르셨다고, 나는 확신했어요.”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비가 지붕을 두드리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하지만 어느 날, 한 아이가 죽었어요. 내가 돌보던 아이였고, 내게 이름을 불러달라던 아이였어요. 나는 그 아이의 이름을 끝내
부르지 못했어요. 그 아이는, 내 앞에서 조용히 사라졌어요.”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고백은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더 크게 울렸다.
“그날 이후, 나는 무너졌어요. 기도도, 설교도, 사람도, 모두 멀어졌어요. 나는 신에게 등을 돌렸고, 동시에 나 자신에게도 등을 돌렸죠.”
그는 고개를 숙였다. “나는 죽은 사람이었어요. 살아 있지만, 살아 있지 않은. 그래서 나는 내 이름을 버렸어요. 그리고 나사로라는 이름을 택했죠. 죽었다가 살아난 자. 그 이름이 나를 다시 걷게 했어요.”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며, 내 안에서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단지 상처 입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상처를 품고 살아가는 법을 배운 사람이었다.
“그 후로 나는 이름 없는 사람들을 찾아다녔어요. 말을
잃은 사람들, 기억을 잃은 사람들, 세상에서 지워진 사람들. 그들에게 이름을 돌려주고 싶었어요. 그것이 내가 살아 있는 이유라고
믿었어요.”
그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깊고, 조용하고, 따뜻했다. “이안, 당신도 이름을 잃은 사람이었죠?”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당신은 이제,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사람이에요.” 그 말은 축복 같았고, 동시에 유언 같았다.
나는 그날 밤, 처음으로 울었다. 그의 고백은 내 안의 침묵을 깨뜨렸다. 그의 상처는 내 상처를 비추었고, 그의 눈물은 내 눈물을 허락했다.
그날 이후,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었다. 나는 그의 고백을 품고 살아가기로
했다. 그의 이름을, 그의 기억을, 그의 유산을.
✦ 제8장:
사라진 이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불이 난 그날 이후, 나는 매일 아침 교회 터를 찾았다. 잿더미 위로 햇빛이 비치면, 나는 그 속에서 그의 흔적을 찾으려
애썼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코트도, 그의 책도, 그의 목소리도. 모든
것이 불에 타 사라졌다.
사람들은 곧 그를 입 밖에 내지 않기 시작했다. 마치 그가 존재한 적 없었던 것처럼. 그의 이름은 점점 희미해졌고, 그의 자리는 조용히 비워졌다. 이름 없는 자들은 여전히 모였지만, 그들의 눈빛엔 무언가 빠져 있었다. 그것은 중심이었고, 불빛이었고, 숨이었다.
나는 그의 이름을 속으로 되뇌었다. “나사로.” 그 이름은 내 안에서 울렸다. 처음엔 또렷했고, 점점 흐려졌고,
어느 순간엔 메아리처럼 되돌아왔다. 나는 그 이름을 붙잡으려 애썼다. 그 이름이 사라지면, 그가 정말 사라질 것 같았다.
밤이면 나는 그가 남긴 말들을 떠올렸다. “기억하세요. 이름을.” 그
말은 단순한 부탁이 아니었다. 그건 유언이었고, 사명 같았다. 나는 그 이름을 지키기로 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어느 날,
나는 그의 흔적을 따라 교회 뒤편으로 걸었다. 그곳엔 작은 정원이 있었고, 불길이 닿지 않은 구석이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낡은 노트를 하나
발견했다. 겉표지는 그을려 있었지만, 안쪽은 멀쩡했다. 그 안엔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짧은 메모와 함께.
“엘리사 – 아직 말하지 않지만, 눈빛이 살아 있다.” “요한 – 손끝이
떨릴 때마다, 그는 무언가를 기억하려 한다.” “이안 – 아직 자신을 부르지 못하는 사람.”
나는 그 노트를 품에 안고 한참을 울었다. 그는 우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우리가 잊힌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의 손글씨는 조용했지만, 강했다. 그것은 존재의 증명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매일 그 노트를 펼쳤다. 이름을 하나씩 소리 내어 읽었다. 그 이름들이 내 입술을 지나갈 때마다, 나는 그들을 다시 만나는
기분이었다. 그들은 여전히 말이 없었지만, 내 목소리를 들었다. 나는 믿었다. 그 이름들이 언젠가 다시 그들 안에서 깨어날 것이라고.
사람들은 여전히 나사로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매일 그의 이름을 불렀다. 혼잣말처럼, 기도처럼, 주문처럼. “나사로.” 그 이름은 내 안에서 살아 있었다. 그가 사라졌다는 사실보다, 그 이름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나를 버티게 했다.
그는 죽었을까? 아니면 어딘가에서 여전히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까? 나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가 남긴 이름이었다. 그 이름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 이름은, 나를 다시 걷게 했다.
✦ 제9장:
바늘귀 하우스
나는 다시 시작해야 했다. 무너진 교회는 더 이상 우리를 품을 수 없었고, 나사로는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남긴 이름들은 내 안에서 살아 있었다. 그
이름들을 지키기 위해, 나는 무언가를 세워야 했다. 그것은
단지 건물이 아니라, 기억의 장소였다.
나는 도시 외곽의 오래된 폐가를 찾았다. 창문은 깨져 있었고, 벽은 곰팡이로 뒤덮여 있었으며, 바닥은 먼지로 가득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그 집에서 따뜻함을 느꼈다. 그건 나사로가 처음 내게 말을
걸었던 그 교회에서 느꼈던 감정과 비슷했다. 무너진 것들 속에만 존재하는 어떤 평온함.
나는 그 집을 고치기 시작했다. 처음엔 혼자였다. 망치질을 하며,
못을 박으며, 나는 그의 이름을 속으로 되뇌었다. “나사로.” 그 이름은 내 손끝에 힘을 주었고, 내 등을 곧게 세웠다.
며칠 후,
한 사람이 찾아왔다. 그는 말없이 문 앞에 서 있었다. 나는
그를 기억했다. 불이 났던 날, 나사로가 마지막으로 끌어낸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도왔고, 그날부터
함께 지붕을 고치기 시작했다.
그 다음엔 또 한 사람이 왔다. 그리고 또 한 사람. 그들은 모두 이름을 잃은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손은 기억하고 있었다. 망치를 쥐는 법, 벽을 세우는 법, 서로를 바라보는 법.
우리는 함께 집을 고쳤다. 낡은 벽을 허물고, 새 창을 달고,
바닥을 닦았다. 그 과정은 단순한 노동이 아니었다. 그건
마치, 우리 자신을 다시 짓는 일이었다.
나는 그 집에 이름을 붙였다. ‘바늘귀 하우스’. 좁고 아픈 통로를 지나야만 들어올 수 있는 집. 그 이름은 나사로가 자주 하던 말을 떠올리게 했다. “가장 좁은
곳을 통과해야, 가장 넓은 곳에 도달할 수 있어요.”
그곳은 점점 사람들로 채워졌다. 말을 잃은 자들, 이름을 잃은 자들, 세상에서 밀려난 자들. 그들은 처음엔 서로를 바라보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천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눈을 마주치고, 손을 내밀고, 때로는
이름을 물었다.
나는 그들에게 이름을 묻지 않았다. 대신, 그들이 스스로 말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 기다림은 길었지만, 그만큼 깊었다. 어느 날, 한 여인이 조용히 말했다. “엘리사예요.” 나는 그 이름을 들으며, 오래전 내 안에서 울리던 그 이름을 떠올렸다.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작았지만, 분명히 존재했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이
집은 단지 피난처가 아니라, 회복의 장소라는 것을. 이곳에서
사람들은 다시 자신을 부르고, 서로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더 이상 침묵하지 않았다. 나는 이름을 외우고, 기억하고, 불렀다. 그것이 나사로가 남긴 유산이었다. 그의 부재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그의 이름은 사라지지 않았고, 그의 뜻은 이 집 안에 살아 있었다.
바늘귀 하우스. 그곳은 작고 조용했지만, 세상에서 가장 넓은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다시 태어났다. 이름을 잃은 자들이, 이름을 부르는 자들로.
✦ 제10장: 이름을 부르는 자
그날은 유난히 조용했다. 바늘귀 하우스의 아침은 늘 고요했지만, 그날의 고요는 조금 달랐다. 마치 무언가가 시작되기 직전의 정적처럼, 공기 속에 작은 떨림이
있었다. 나는 부엌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마당을 바라보고
있었다. 햇빛이 천천히 벽을 타고 내려오고 있었고, 먼지가
그 빛 속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그녀는 마당 한쪽에 앉아 있었다. 엘리사. 그녀는 이 집에 온 지 두 계절이 지났지만, 여전히 말이 없었다. 이름을 말한 날 이후, 그녀는 다시 침묵 속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나는 그 침묵이 예전과는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건 두려움의 침묵이 아니라, 기다림의
침묵이었다.
나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햇빛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있었고, 손끝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녀 옆에 앉았다. 말없이, 조용히.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다가, 나는 입을 열었다. “엘리사.” 그
이름은 내 입술에서 아주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마치 처음 말을 배우는 아이처럼, 나는 그 이름을 천천히 불렀다.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그 눈빛은 놀람과 두려움, 그리고 희망이 섞여 있었다. 나는 미소 지었다. “당신은 잊힌 존재가 아니에요.” 그 말은 오래전 나사로가 내게 했던 말과 닮아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내가 그 말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 눈물은 조용히 흘렀고,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들었다. 그녀는 받아들였다. 그녀는, 돌아왔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름을 부른다는 건 단지 누군가를 부르는 일이 아니었다. 그건 존재를 다시 이 세상에 불러오는 일이었다. 그 사람이 잊고
있던 자신을, 다시 기억하게 하는 일이었다.
나는 이제, 이름을 부르는 자가 되었다. 나사로가 내게 남긴 유산은 단지 기억이
아니었다. 그건 살아 있는 실천이었다. 나는 매일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고, 그 이름들은 다시 살아났다.
바늘귀 하우스는 여전히 작고 조용한 집이었다. 하지만 그 안엔 수많은 이름들이 있었다. 잊혔던 이름, 버려졌던 이름, 스스로를 부르지 못했던 이름들. 그 이름들은 이제 서로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름이란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그것은 단어가 아니라, 생명이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는 건, 그 사람을 이 세상에 다시 존재하게 하는 일이다.
그리고 나는, 그 일을 계속할 것이다.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 그 이름이 다시 살아나기 위해.
출판 제안서 초안
제목: 《이름을
부르는 자》 장르: 현대 서정 소설 / 우화적 성장 서사
분량: 약 60,000자
(10장 구성 + 프롤로그/에필로그/작가의 말 포함) 작가명: Won
작품 개요: 《이름을 부르는 자》는 이름을 잃은 사람들과 그들의 이름을 다시 불러주는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은 상실과 침묵 속에서 살아가다, 낡은 교회에서 ‘나사로’라는 인물을 만나며 삶의 전환점을 맞습니다. 이야기는 신앙적 상징과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아, 상처
입은 이들이 서로를 회복시키는 과정을 서정적으로 그려냅니다.
작품 특징:
- 이름을 통해 존재와 기억, 구원의 의미를 탐구하는 철학적 서사
- 절제된 문체와 상징적 공간(교회, 바늘귀 하우스)을
통한 깊은 정서 표현
- 종교적 은유와 현대적 우화가 결합된
독창적 세계관
독자 대상:
- 『아몬드』,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파과』 같은 감성적
서사를 좋아하는 독자
- 상처, 회복, 존재의 의미에 관심 있는 20~40대 독자층
- 문학적 깊이와 서정성을 갖춘 작품을
찾는 독자
출간 의의: 이 작품은 단지 한 사람의 성장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잊고 있던 ‘이름’의 의미를 되새기게 합니다.
말하지 못한 사람들, 불리지 못한 존재들, 그리고
그들을 다시 부르는 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침묵의 시대에, 이
소설은 조용하지만 강한 목소리를 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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